선비 설교
주가 쓰시겠다 하라
둘리오
2023. 4. 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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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태복음 21장 1~11절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으로, 예수님은 오늘 사건이 있은 지 닷새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수난을 당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사신 생애는 철저히 성경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신 삶이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인 오늘부터 금요일까지의 일정을 이미지로 잠깐 알려드립니다. 잘 만들어 놓은 자료가 있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여야 합니다. 유월절 절기가 되면 전통적으로 유월절 순례를 걸어서 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도 예루살렘 직전까지 걸어서 이동을 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이 당시 예루살렘에는 250만명 이상이 모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예수살렘에 모여야 하는 게 법칙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을 생각해 볼 때 몇 백명이 모인 게 아닐 겁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을 겁니다. 축구장에 6만명만 모여도 옆의 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웅장한데, 예루살렘에는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부르며 소리 높인다고 상상해봅시다. 얼마나 웅장했겠습니까? 얼마나 소리가 컸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 소리에 눈이 동그래지고 흥분하고 설레였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100% 사람이시고, 100% 신이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인성과 신성을 겸비하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환호에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께 명령한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왕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메시야 만세'의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왕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처럼 위대한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합니다. 전쟁에도 훌륭하고 우리를 억압한 사람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던 그 모습처럼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예수님 쿠데타를 일으켜 주세요. 로마 군인들을 물리쳐 주세요. 우리에게 독립을 허락해주세요. 우리를 속박에서 자유하게 해 주세요. 우리를 건져주세요. 하면서 예수님을 부르는 겁니다. 다윗처럼 위대한 나라를 만들어주세요. 솔로몬의 때처럼 부자가 되게 해 주세요. 고통이 없게 해 주세요. 등등의 요구를 자기들 마음껏 요구합니다.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 지옥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금요일까지 매일매일 준비하시고 십자가를 알려주시고 구원의 방법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군가가 나를 팔아 넘길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죽음의 두려움도 이겨내신 그분의 순종이 우리를 살려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나귀를 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이러한 겸손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마 11:29, 벧전 5:5-6).
단지 자기를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포기할 수 있는 겸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여러분들이 위대한 리더가 되기를 바라며 겸손한 리더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제자에게 말합니다.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나귀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영광스럽게 사용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은 그 나귀의 실소유주는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28:18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 말씀하셨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 나귀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를 주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고, 부르실 때 바로 나아가야 합니다.
핑계 대면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네’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쓰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거 먼저 하고요. 저거 먼저 하고요. 잠시만 있다가요.’ 이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바로 순종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면 ‘네. 감사합니다.’ 하면서 순종하면 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그 분께서 나를 더 잘 사용하실 겁니다.
우리의 질문이 바뀌어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왜요?’라고 하지 마세요. 이 질문은 우리를 주저앉게 만듭니다.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보다 불평을 가지게 하고 멈추게 할 때가 많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지? 왜 해야하지? 왜 나만 그렇게 힘들지?
다른 사람은 다 아닌데 왜 나만 이럴까? 왜. 왜. 왜… 이런 질문 하지 마세요.
우리가 해야할 질문은 ‘어떻게’ 입니다. ‘무엇을’ 입니다. ‘언제’ 입니다.
이 질문으로 바꾸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겁니다.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라고 묻기보다 ‘어떻게’, ‘무엇을’, ‘언제’라고 질문했습니다.
왜는 불평입니다. 어떻게가 길을 찾는 질문입니다. 기억하세요.
저의 작은 간증이 있습니다.
예전에 드럼이 교회에 생겼을 때에요. 한 성도님께서 드럼을 교회에 헌물로 드렸습니다. 멋진 드럼이었고, 교회에서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선물을 주신 겁니다. 그 때 드럼을 반주하는 사람이 중학교 2학년 친구였었습니다. 아무래도 집이 먼 친구였기도 하고 평일에 나올 수 없기도 해서 주일을 제외하고는 이 악기가 사용되지 않고 있었어요. 드럼이 있으면 찬양할 때 반주가 더 풍성해지고 더 신이나고 즐겁고 기쁘게 찬양할 수 있는데, 안타깝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떻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드럼 반주자가 금요철야예배에도 섬길 수 있을까? 누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그 고민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제가 문화센터에 드럼 수업 등록을 하게되었고, 연습을 꾸준히 하면서 제가 드럼 반주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풍성한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을까? 무엇을 하면 더 기쁘게 예배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 이렇게 이뤄졌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도전합니다. 질문을 바꾸시고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면 핑계대지 말고 바로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작은 질문과 순종 때문에 우리 교회에 드럼 반주자가 이렇게 많아진 것입니다.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순종했더니 이런 일들이 생겼습니다. 지금은 드럼 전공자도 생겼고, 저보다 훌륭한 반주자들이 즐비합니다. 저는 그게 너무 행복하고 기쁩니다. 저도 한 때 우리교회에서 드럼반주로 1등이었지만, 지금은 꼴등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하나님께 드릴 예배가 더 아름다워졌고 풍성해졌기 때문이에요.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하면 될까? 무엇을 먼저할까? 언제 시작하지?
이렇게 질문하는 게 옳은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에 우리는 순종하면서 이런 질문들을 해야 합니다.
‘왜 나만 시켜요. 왜 내가 해야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순간. 혼쭐 납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사탄 뿐입니다.
반항하게 하고 싸우게 하고 시기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하시기를 원하시나요?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입니다.
요한복음 3장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며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되시는 이유입니다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상처 투성이인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제가 자동차면 우리 주인이 저를 타줬으면 좋겠어요. 차의 정체성은 달리는 겁니다. 피아노면 우리 주인이 쳐 주길 기다릴 겁니다. 우리의 주인이 나를 사용해 줬으면 좋겠다. 그게 목표입니다.
우리의 주인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쓰시겠다고 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러면 우리는 두 말 없이 바로 순종하고 달려가면 됩니다. 오늘 말씀처럼 예수님은 나귀 새끼의 주인이며, 그것을 자기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를 자기의 뜻대로 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풀어 보내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복종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로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며, 백성들에게 환영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과 부르심에 순종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물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쓰시겠다고 하시든지 기꺼이 따르고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과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께 영혼과 몸과 생명을 드려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영광받으시는 우리의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주의할 것은 겉모양만 그럴싸한 성도의 모습을 가지면 안 됩니다. 우리도 내가 이러한 사람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는 착한 척, 은혜로운 척하는 데 학교에서는 욕하고 친구들 학폭하고 그러면 안됩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꿰뚫어보시는 그분께서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사랑의 눈으로 보고 계십니다. 겉으로 선한척하고 믿음이 있는척해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다른 뜻으로는 ‘구해주세요, 지금 도와주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수많은 무리가 진실한 성도들처럼 보였지만,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함께한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능력있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좋아했지만, 고난받는 예수님을 따르기는 싫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유명해지고 위대해지고 영광을 얻고자 하면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에도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좋을 때만 함께하는 것은 이기적인 겁니다. 가족은 모든 순간을 함께합니다. 힘들 때도 좋을 때도 함께하는 것, 그것이 가족이고 성도의 연합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 인정받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원한다면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고,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다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방법을 허락해주셨고, 예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심으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 안에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이 종려주일이라고 했지요.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 새로운 삶, 구원받은 삶을 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신 날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향한 예수님의 순종, 그 안에 담긴 것은 자기 백성을 살리시려는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할 때 바로 순종하며 따르는 우리 청소년부 학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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