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복음 10장 25절 ~ 37절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호텔왕 조지 볼트 이야기 (George Boldt)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늦은 밤 차를 몰고 가던 노부부가 호텔의 객실을 구하지 못한 채 필라델피아의 허름하고 작은 호텔을 찾았습니다.
“예약을 못 했는데, 혹시 방이 있습니까?” 노부부가 말했습니다.
당시 도시에 행사와 폭우로 인해 호텔마다 만원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빈 객실이 없습니다. 그러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하면서 다른 호텔도 수소문 해 봤습니다. 그런데 빈 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사정이 딱해 보였던 직원은 노부부에게 말했습니다.
"다른 호텔도 여기와 마찬가지네요. 객실은 없습니다만, 폭우가 내리치는데 차마 나가시라고 할 수가 없네요. 괜찮으시다면 누추하지만 제 방에 서 주무시겠어요?"
그러면서 직원은 기꺼이 자신의 방을 그 노부부에게 제공했습니다. 직원의 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을 맞이한 노인이 고마움에 방값의 3배를 건넸으나, 그는 자신의 방은 객실이 아니므로 돈을 받을 수 없다면서 극구 사양했습니다.
"어젠 너무 피곤했는데 덕분에 잘 묵고 갑니다. 당신이야 말로 제일 좋은 호텔의 사장이 되어야 할 분이네요. 언젠가 제가 집으로 초대하면 꼭 응해주세요." 라고 말하고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날. 그 호텔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던 직원에게 편지 한 통과 함께 뉴욕행 비행기표가 배달되었습니다. 2년 전 자신의 방에 묵게 했던 노부부가 보내 온 초청장이었습니다. 그는 뉴욕으로 갔습니다. 노인은 그를 반기더니 뉴욕 중심가에 우뚝 서 있는 한 호텔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호텔이 맘에 드나요?"
"정말 아름답네요. 그런데 저런 고급 호텔은 너무 비쌀 것 같군요. 조금 더 저렴한 곳으로 알아보는 것이 좋겠어요."
그러자 노인이 말했습니다.
"걱정마세요. 저 호텔은 당신이 경영하도록 내가 지은 겁니다."
그 노인은 백만장자인 월도프 애스터(William Waldorf Astor)였고, 조지 볼트의 배려에 감동해 맨하튼 5번가에 있던 선친 소유의 맨션을 허물고 호텔을 세운 것입니다.
변두리 작은 호텔의 평범한 직원이었던 조지 볼트는 그렇게 노부부에게 했던 마음 따뜻한 친절과 배려를 통해 미국의 최고급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조지 볼트는 노부부의 딸과 결혼했고 배려를 바탕으로 호텔을 성공적으로 경영했습니다. 이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실화로 1893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 성경 내용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제목으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율법교사(서기관)가 예수에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몰라서 답을 찾고 싶어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하신 주님이 “성경은 이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느냐?”라고 되물어 봅니다.
그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답하죠.
예수님은 그에게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라는 뜻은 자신이 얼마나 율법 실천에 앞장서고 있는지를 알리고 싶어서 예수님께 이웃에 대해 다시 물어본 것입니다. 의도가 선하지 않죠? 여러분들은 이런 뽐 내거나 과시하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간단한 요약을 하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도 빼앗기고 돈도 빼앗기고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땅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신음하면서 겨우 목숨만 붙어있는 상황의 그를 본 사람들이 그를 구하지 않고 모른 척 하고 지나친다는 겁니다.
먼저 제사장이 나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목사님 정도가 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제사장이 못 본체하고 지나칩니다.
두 번째로는 레위인이 나옵니다. 교회에 직분자 그러니까 권사님, 장로님, 집사님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사람도 모른 체하고 지나쳤습니다.
이 사람들이 피한 이유는 뭘까요?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한 이유를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손해가 일어날까봐 입니다. 바쁘고 시간도 없고 괜히 도움을 주다가 나만 곤경에 빠지면 안된다. 그냥 지나치자. 이런 마음을 가지고 피했습니다.
앞의 두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마리아인은 죽게 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었고 치료해주었습니다. 그에 더해서 주막에까지 데려가고 주막 주인에게 치료해주면 돈을 더 주겠다고 하며 자신의 일을 마치러 돌아가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과 율법교사가 생각하는 이웃의 개념 속에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이 제외했습니다. 우리가 일제시대를 살고 있을 때 일본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강도에게 돈도 빼앗기고 맞아서 죽게 되었는데, 이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은 일본 사람이 와서 그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과 비슷한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 중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사마리아인은 그들에 비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개나 짐승으로 취급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선을 베풀었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질문합니다.
“누가 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인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율법교사도 참 고집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면 쉬울텐데 차마 그말을 못하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한 그 대답을 듣고나서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도 이와 같이 그렇게 해라.”
여러분 이웃은 누구입니까?
옆에 사니까 이웃이 아니에요. 거의 대부분이 아파트에 사니까 옆집, 아래 윗집에 사는 사람들이 이웃이라고 생각하지만 관계를 맺지 않고 돕지 않는다면 이웃이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우리도 배워야 하고 따라해야 한다는 겁니다. 진정한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웃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행동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돕기는 힘듭니다. 주변에 어려운 이웃, 노숙자들이 보인다면 도와야 합니다.
학생으로 우리가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죽음으로 가는 길에 빠진 친구를 구하는 것.
자살 직전에 있는 친구를 도와주는 것.
굶고 있는 친구를 밥 사주는 것.
노숙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허락하는 것.
이런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작은 실천으로 배려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지 조심스러워 하는 것도 이웃 사랑의 실천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5~40절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튀르키에와 시리아에 지진이 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규모 7.8과 7.5의 두 차례 강진으로 인한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누적 사망자 수가 2만명을 넘어섰다. 현지 전문가들은 최대 20만명의 시민이 여전히 무너진 건물 잔해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일란 켈만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재난보건 교수는 “지진 생존자의 90% 이상이 72시간 이내에 구조됐다”며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경우에는 눈과 비를 동반한 영하의 날씨 탓에 건물 잔해에 갇힌 사람들이 저체온증 등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품고 사랑하고 구해주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한 사랑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그의 모습을 우리도 닮아야 합니다. 내 몸을 주면서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녀로 택함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통해 우리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성장시켜 줄 것입니다.
튀르키에와 시리아에 지진이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중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그들을 위해 도울 길을 찾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이 구절은 크리스찬이 살아야 할 삶의 기본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그대로 하나님도 우리를 대해 주실 것이다.
오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접하라. 네 이웃을 도와라. 그리하면 너에게 내가 그렇게 해 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고 전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명령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이런 선한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
-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나요?
상처를 싸매주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고 도움을 요청했다. - 튀르키에를 위해서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 황금률의 말씀은?
마태복음 7:12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